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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전봉준이 일으켰던 동학농민운동을 구실로 삼아서 조선 땅으로 군사 파병을 보냈던 일과 볼일이 모두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라는 조선의 요청까지 묵살한 뒤 경복궁에서 총질을 해대고 고종까지 납치한 사건들은 하나도 우연이 아니였습니다. 일본에게는 아주 잔악하고 큰 그림이 있었던거지요. 청나라가 종주국 노릇을 조선에서 하고 있던 것을 내쫒고 조선을 차지하고 싶었던 속내가 있었죠. 역사상으로 긴 시간동안 조선의 종주 역할을 하던 청나라가 버젓이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경복궁을 무력 점령하겠다던 것은 이미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붙어보겠다는 각오를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에는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한판 시작합니다. 1894.07.25, 일본 군들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강제 점령한 지 이틀이 지난 후, 충청남도 당진의 풍도 앞바다쪽에서 일본 해군들이 청나라 해군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합니다.

단 하나의 선전포고조차 없었지요. 정말 기습공격을 날린 일본입니다. 다시끔 설명드리겠지만 일본은 이런 기습 전략을 아주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자면 태평양 전쟁과 러일정쟁 그리고 진주만에서도 기습을 행했죠.

어쨌든 청나라에 선제공격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청과의 싸움이 시작이 됩니다. 청일전쟁이 일본 지역이나 청나라 지역에서 벌어졌던 전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청일 두 나라간의 전쟁은 비통하게도 조선 땅에 벌었던 전쟁입니다. 이제 공격받은 청나라에서도 마냥 지켜볼 수는 없겠지요.

 

청나라 본진에서도 일본 군사력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미 모두 파악을 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특히 해상에서 펼쳐지는 해전에 있어서는 섬으로 둘러쌓인 일본이 아주 유리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청나라는 일본은 지상전을 통해서 꺾어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평양으로 결전 장소를 정했습니다.1804.09.15 평양 지역에서 청나라 군대 14,000명과 일본 군대 17,000명이 싸움을 붙게 됩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완벽하게 일본군이 승리했지요. 일본 군대의 전사자는 200명 정도였지만 청나라의 전사자는 무려 2,000명이고 게다가 부상자도 4,000명이 발생했지요. 청나라는 지상전에서조차도 일본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반면 청나라에서 청불전쟁은 구태의연한 군주제를 취하는 창조의 역사적 역할을 끝내는 계기가 됐습니다. 전후 서태후와 관료들은 해군의 근대화와 지휘권 통합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조 내 부패로 개혁은 진행되지 않고 청일전쟁에도 패하기에 일렀습니다.  톈진 조약에 따라 창조는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전시에 10억 냥 이상을 전비로 소모해 약 2억 냥의 채무를 떠안았습니다. 막강 해전에 즈음하여 푸젠 함대의 패배는 창조가 추진해 온 근대화 정책(양무운동)을 후퇴시켰습니다.

 

청불전쟁의 교훈은 모두 청 제국의 전근대적 지휘계통과 장비를 보여주었습니다. 주요 함대 중 일부는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이를 일본에 대한 대비책으로 삼았다는 제국 상층부의 변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호랑이해군 부대를 내보낸 것이 프랑스군을 유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청일전쟁 중 청나라의 외채는 약 4,000만 냥이었습니다. 여기에 배상금 2억 냥, 요동 환급금 3,000만 냥을 더한 지급은 청나라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창조 정부의 재정 규모는 일본 정부의 재정 규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하니 청나라로서는 수년 치 세수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는 손실이었습니다. 거액의 배상금을 일본에 지급하기 위해 청나라는 외국은행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1895년부터 1898년까지 노 불은 행에서 1억 냥, 영·독 은행에서 2억700만 냥을 차입해 그 담보로 관세와 염세·기금을 충당했기 때문에 청나라는 대외무역과 교통 운수의 명맥을 외국은행에 의해 쥐게 되었습니다. 제조업 영업권은 최혜국 대우로 일본과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영국 등 구미 각국에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준 한편 청나라 내 상공업의 발전을 압박했습니다. 1895년부터 1902년까지 8년간 열국의 재화 기업 투자 총액은 그 이전의 30배에 달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아시아 초강대국에서 잠자는 사자로 여겨져 온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그 약체를 세계에 드러냈습니다. 열강들은 낡고 강대한 국가로 여겨져 온 청나라의 저항력에 아무런 환상을 갖지 않게 됐습니다. 서방국가들은 한층 중국 분할에 나서게 되는데, 그 선두를 차지한 것이 청나라의 친구로서 요동 환급 권고를 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3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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