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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에도막부 시대의 하급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막부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점점 쌓여 갔습니다. 쇼군은 대체 무엇을 하는 건지, 월급도 제때 주지 않으면서 서양 세력에 무릎을 꿇다니 말이죠. 게다가 덴노는 정말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요. 허수아비지만 신이었는데 말이죠. 하여간 하급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던 일본에 한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시모노세키가 있는 곳 이자,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지역구인 지금의 야마구치현 입니다. 에도막부 시대에는 조슈번이라고 불렸던 장소입니다. 일본의 행정구역을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에도막부 시대에는 지방을 번 단위로 나누어서 다스렸어요. 그러다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현 단위로 바뀝니다.

 

하여간 1830년, 조슈번이라는 지방에서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에도 말기, 불만 폭발 직전의 하급 무사 가운데서도 최하급 무사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연히 어릴 적부터 에도막부 정부에 대해 악감정이 있었겠지요. 1830년생이니까 요시다 쇼인이 10살 때인 1840년 청나라가 영국에게 지는 것까지 봤고, 1853년에는 23세 성인으로 일본이 미국에게 굴욕적으로 강제 개항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젊은 사무라이는 불만만을 품고 있던 게 아니라 실제로 나라를 뒤집어 엎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존왕양이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존왕, 말 그대로 왕을 존경하자는 뜻입니다. 즉, 무식한 에도막부 군사정권을 끌어내리고 원래의 군주인 일왕(덴노)을 모시자고 주장하는 겁니다.

양이는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뜻이죠. 일본에 눈독 들이는 서양 세력을 물리치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쇼인은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정한론을 주장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 한반도를 삼한인 마한, 진한, 변한으로 보고 그 곳을 정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서구 세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선 본래 일본 땅이었던 조선을 정벌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치기 위해선 먼저 다케시마, 즉 독도를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이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은 후에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기본 이론이 됩니다. 그리고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일본 측 주장의 근거가 되지요.

 

우리 입장에서는 이 사무라이 출신인 요시다 쇼인이 악의 근원이었던 거죠.  동시에 쇼인은 영리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모든 이들은 덴노 아래 모두 평등하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진 주장이었는지 에도막부와 상급 사무라이들에게 불만을 가졌던 하급 사무라이들을 열광하게 만듭니다. 모두가 다 평등하다면 우리 9급 공무원인 하급 사무라이들도 거만했던 1급 공무원인 상급 사무라이와 동등하다는 뜻이네 라고 깨닫게 되었죠. 당시 사회에 불만이 있었던 하급 사무라이들이 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몰려듭니다. 요시다 쇼인은 이 사람들을 보고 제자들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는 정식적인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곧장 그 계획을 실천으로 옮겨서 학교를 직접 세웠습니다.

 

한편 손문은 청일개전과 거의 동시에 혁명으로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국 수립을 주창했습니다. 청조를 유지하면서 일본을 본떠 공고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변법파 정견은 젊은 광서제를 움직여 1898년 6월의 "국시의 조"에 의해 정식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서태후 등 보수파의 쿠데타로 불과 3개월 만에 좌절되자 서태후는 황제로부터 정권을 얻어 수렴청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쿠데타를 무술의 정변, 단기간에 끝난 위에서의 개혁을 무술의 변법 또는 백일유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비록 주병권을 잃었지만 긴급 출병권을 확보한 청나라는 원세개를 중심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1885년 4월 14일 영국은 갑자기 한반도 남쪽 앞바다에 있는 거문도를 점령했습니다. 이는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인도양 출동을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거문도에서도 주변 연안 일대에서도 정부에 대한 보고가 일절 없었고, 조선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곤도 임시대리공사의 보고를 받고서였습니다. 영국은 거문도 점거 사실을 조선에 통보하지 않고 영국 주재 청국대사인 증기택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영국이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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