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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일본을 강제 개항한 미국

티버아빠 2023. 1. 10.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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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으로 일본 근대사 속으로 들어가볼까요? 여러분이라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나쁘다는 건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 나쁜 지에 대해서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적어요. 지금부터는 그 대답을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짚어드리겠습니다. 때는 1830년대 일본, 당시 일본은 에도막부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였어요. 막부는 간단히 말해서 쇼군이 이끌던 군사정권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리고 앞의 애도는 지역을 뜻했습니다. 에도가 지금의 도쿄에요. 정리해서 에도막부는 에도라는 곳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이겠죠. 설명을 덧붙이자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들 아실겁니다.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 야스와의 권력싸움에서 지게 됩니다.

 

당시 도요토미의 세력권은 오사카였어요. 권력 싸움에서 이긴 도쿠가와의 세력권이 에도였고요. 당연히 싸움에서 이긴 사람의 땅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지가 되겠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에도막부랍니다. 한마디로 도쿄에 세워진 군사정권인거죠.

1840년, 이러한 에도막부 시대의 1인분에 어마어마한 국제뉴스 하나가 들어섭니다. 일본 인간에서 보면 세계 최장대국이던 청나라가 영국과 전쟁에서 대패했다는 외신이었죠. 1840~1842년 사이의 아편전쟁 소식이었습니다. 에도막부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대국인 청나라가 영국 합신 및 적에 백기를 들었다니요. 일본 열도가 이 서구 열강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던 찰나, 일본에도 서구 열강이 손을 뻗습니다. 1853년 미국의 매슈 페리제독이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 입항한 것입니다. 그러하면서 개항을 요구했어요. 미국과 일본이 무역을 시작하자는 뜻입니다. 당시 페리 제독이 타고 일본에 입항한 미국 함선이 검은색이어서 일본에서 그 배를 구로후네라고 부르면서 그 압도적인 크기와 규모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미국의 개항 요구에 에도막부는 1년만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시간을 법니다. 그리고 1년 사이 에도막부 내에서 격론이 벌어져요. 개항해야 한다. 와 맞써 싸워야 한다 등의 의견으로 나뉘었죠.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페리 제독이 다시 일본을 찾아왔어요. 약속은 지켜야죠. 일본 에도막부는 1856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맺고 미국에게 나라를 완전히 개방해주는데 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과 맺은 조약이 매우 불평등했던 겁니다. 예를 들어 미국 상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은 처벌하지 못한다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던겁니다. 일본인들은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이 에도막부란 정권은 도대체 왜 저렇게 외세에 비굴함을 보이는 지... 자존심도 없는 지... 라고요. 특히 어떤 계층이 격분했냐면 사무라이 계급이었습니다. 사무라이라면 보통 칼 들고 싸우는 무사로 알고 있는데 에도막부 후기에 와서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에도막부는 약 260년간 전쟁이 없었던 평화의 시기였어요. 전쟁이 없으니 사무라이들이 칼 들고 싸울 일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면 사무라이들은 뭘했냐면 월급을 받고 관공서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공무원이 하는 일들을 하고 있었답니다.

 

이 시기에 또 사무라이가 얼마나 많았냐면 당시 일본 인구가 3,400만명 정도였는데 공무원 사무라이는 무려 300만명이나 되었답니다. 그럼 일본의 재정 상태는 이 모든 공무원 사무라이들에게 월급을 넉넉히 줄 정도였냐 하면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어요. 상급 사무라이는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생활이 가능했는데 하급 사무라이들의 생활은 정말로 비참했습니다. 그럼 이들이 조선이나 중국 같이 과거 시험을 보고 개천에서 용 나듯이 출세하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겠죠. 하지만 일본에는 우리나 중국 같은 과거 제도가 없었답니다. 그리고 사무라이는 세습이었어요. 즉, 아버지가 사무라이라면 아들도 사무라이, 아빠가 하급 사무라이면 아들도 하급 사무라이인거죠. 보고를 받고도 거의 무관심했던 조선 정부도 설명을 듣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영국에 항의했지만 거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청나라가 영러 양국을 상대로 한 결과 약 2년 뒤인 1887년 3월에야 거문도에서 영국군이 철수한 것입니다. 1887년 조선 정부는 조약 체결국에 공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나 8월 청나라는 조선의 공사 파견에는 청나라 황제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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